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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8 06:55
파격인 듯 착시인 듯… 김정은의 ‘양날 화법’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64  


비핵화, 핵ㆍ미사일 모라토리엄 등

통큰 제안마다 전제조건 달아

군사위협 해소ㆍ체제보장 요구는

美 대북 적대 정책 철회와 동의어

표현만 바꿔 입장 변화로 포장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6일자 1면에 실린 사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별사절단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김 위원장이 걸어가며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대북특별사절단이 5~6일 평양에 가 듣고 온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말들은 파격적이다. 일단 북한의 비핵화 거론 자체가 오랜만이다.

김 위원장 집권 직후인 2012년 북미회담 결과물인 2ㆍ29 합의 때가 마지막이었다. 더욱이 지난해 11월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발사한 뒤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기 전까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모진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보름이 멀다 하고 탄도미사일을 쏴대던 김 위원장이다.

액면만 보면 더할 나위가 없다. 특사단 방북 전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 표명이나 핵ㆍ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잠정 중단) 선언, 두 가지 중 하나만 해줘도 북미대화의 입구가 열릴 공산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미국이 요구했을 만한 두 가지 조건을 그는 모두 수용했다. “비핵화가 목표란 선대 유훈은 변함 없다”고까지 했다.

비핵화 문제를 놓고 미국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거나 모라토리엄 가능성을 그가 직접 확인한 것도 의미 있는 망외의 소득이라는 평가다. 심지어 그는 우려와 달리 모라토리엄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연계하지도 않았다. “4월부터 예년 수준 훈련이 진행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면 조절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잔뜩 걱정했던 한미를 멋쩍게 만들었다.

문제는 조건이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북미 대화의 입구와 출구에 모두 전제조건을 달았다. “조건 없는 협상이 어디 있느냐”는 반론에도 국내 보수 진영이나 미측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유다. 우선 그는 “추가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약속 앞에 “대화 기간 동안”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는 북한의 모라토리엄이 선행돼야 대화를 개시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자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핵ㆍ미사일 도발을 하겠다는 협박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게 보수 성향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미 훈련을 양해한다는 취지의 김 위원장 발언도 논리를 파고들면 ‘내년에도 한미가 훈련을 하려 한다면 신뢰가 깨진 셈이니 약속도 깨겠다’는 말과 다름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 큰 빌미는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 앞에 붙은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조건이다. 이는 북한이 줄곧 미국을 상대로 요구해 온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와 동의어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7일 “표현을 교묘하게 바꿔놓는 바람에 변하지 않은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있는 것처럼 착시가 유도된다”고 했다.

일각에선 김 위원장 약속 중 ‘남측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도 선의에서가 아니라 한국을 함정에 빠뜨리고 한미를 이간하려는 의도에서라는 얘기마저 나온다. ICBM 등 북한 핵 전력으로부터 위협 당하는 동맹 입장에서 남북 간 안전 보장이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 다른 곳에 방점을 찍으며 갈등을 벌여봐야 소모적이기만 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김 위원장 메시지의 진의를 해석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김 위원장 등 북측 고위급 인사를 만나 의심 가는 부분을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냐고 미국을 설득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