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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2-21 19:37
북한문화재....여러분은 어느곳에 가 보았습니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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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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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 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현무문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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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과 을밀봉 사이에 있어 평양성 북방 방위의 요충이었다>

 

평양성 - 평양시 중구역 , 평천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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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 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정릉사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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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 8각9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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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올 때에 그 앞에 지은 절이다 오래 전에 허물어져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찾아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발굴할 때 여기에서는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개의 탑터, 그리고 물도랑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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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王陵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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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상 : 오이, 재사, 송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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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당(전실 높이 10m, 제실높이 13m)

 

 

대동문 -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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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고려의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고려시대 말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 1573년에 고쳐지어 문충당이라 부르다가 1575년에 사액을 받아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 외 16세기의 철학가인 화담 서경덕과 17세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잠곡 김육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추모하여 제사하였다.


범사정 - 개성시 박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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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정은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1700년에 세운 조선시기 건물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옆에 끼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 '중경지'에는 1700년에 이 건물을 세우고 옛 이름대로 현판을 달았다고 쓰여 있다>

 

박연폭포 - 개성시 박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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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 중심으로부터 26km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에 끼어 계곡에 있고 높이는 35m이다. 폭포위에 박연이라고 불리는 직경 8m의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고모담이라고 불리우는 직경 40m의 용추의 물가에, 큰 '용암'이 수상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용추의 동쪽언덕에 범사정이라는 절이 있다. 옛날 어느 만월밤 박진사라는 청년이 불고 있는 피리소리에 홀려서, 이 호수의 용녀가 그에게 반해 호수속으로 유인해가 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슬픈나머지 폭포밑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에 호수를 박연이라하고, 폭포밑 담을 고모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부터 조선 3대폭포 중 하나이다 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왔다>

 


개성성 내성 -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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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성 내성은 고려 수도성인 개성나성 안의 일부 구간을 막아 쌓은 성이다. 축성 공사는 고려시대 말(1391)부터 조선시대 초(1394)까지 진행되었다>

 

 

후릉 -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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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쌍릉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왕후가 1412년에 먼저 죽고 1420년에 정종이 죽어 이 능에 묻혔다>

 

 

황해도

해주 석빙고 -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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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석빙고는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내부길이 28.3m, 내부 높이 4.5m인 석조 건축물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咸鏡道

鏡城邑城 南門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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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門正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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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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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읍성은 1107년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1437년에 토성의 일부 구간을 석성벽으로 고쳤고, 현재의 성은 1616년부터 1822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요고형 성벽으로 쌓은 것이다. 이때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이 갖추어졌다 남문은 1756년에 무지개문(홍예문)으로 개축하였고, 1838년에는 남문루를 고치고, 그후 수성문 현판을 달았다. 성벽의 높이는 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 사방에 각각 한 개씩의 성문을 내어, 정문인 남문은 수성문이라 하고, 동문은 용성문, 서문은 호위문, 북문은 현무문이라 불렸으나 일제시대에 파괴되고 현재 남문 만 남아 있다. 또한 성가퀴 510개를 4m에 1개씩 배치하여 새로운 공성무기에 대처토록 하였고, 이 성가퀴에 멀리 쏘는 구멍과 가까이 쏘는 구멍을 내었다. 성 안에서는 54개의 우물자리와 12개의 못자리, 수구문자리 등이 확인되었다. 성 둘레에는 너비 34m, 깊이 4.5m의 해자가 돌려져 있었다. 경성읍성은 우리나라 동북방어의 중진으로, 이 성을 중심으로 위성방어체계, 중간방어 체계, 전연방어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성의 독특한 축성형식은 수원성 등 후세의 성들에 계승된다>

 

 


鏡城邑 정북사 - 함경북도 鏡城邑 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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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화상

<정북사는 조선시대 건물로, 1437년에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은 1901년에 중수된 것이다. 정북사는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의 동북국경지대를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윤관을 추모하는 사묘로 세종 19년(1437년)에 세웠다. 윤관은 당시 우리나라 동북 국경지대에 침입한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들의 촌락 135개를 평정하였으며, 납치되어 갔던 백성들을 찾아옴으로써 북방방위에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북사에는 그 내력을 자세히 새긴 비가 있어 도움이 된다>

 

 

鏡城 鄕校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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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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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경성향교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勝岩山의 동쪽 기슭에 동해 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남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북사가 있고, 남동쪽 약 1km되는 곳에는 옛 邑城이 있다. 다른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지 않게 파괴되어 지금은 바깥문, 대성전, 서무만이 남아 있다. 이 세 건물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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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文里24개돌유적 - 함경북도 鏡城郡會文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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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鏡城郡 會門里에 위치한 발해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회문리 소재지에서 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밭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돈화시 소재지 교외나 관지, 해청방, 요전자 등에서 알려진  24개 돌유적들과 같은 성격의 특수한 기념건축물터이다. 유적의 기단은 남북 19.2m, 동서 13.5m의 장방형으로 생겼으며, 높이는 1m 정도이다. 기단 위에는 한 줄에 8개씩, 세 줄의 주춧돌이 놓였다. 주춧돌이 놓인 부분은 남북 10m, 동서 7.8m이며, 주춧돌 열 사이의 거리는 3.9m이다. 현무암을 대충 다듬어 만든 주춧돌은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70-90cm 정도이며, 땅 속에 30cm 가량 묻혀 있다>

 

 


종성읍성-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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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읍성은 두만강 연안의 방비를 한창 강화하던 시기인 15세기 중엽에 처음 쌓고, 17세기 초엽(1608년)에 줄여 중성을 쌓았으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수항루는 종성읍성을 개축하던 시기에 두만강 건너에서 우리나라를 노리는 외부 침략자들에게 대비하기 위하여 지은 3층 누정이다. 기둥은 흘림형으로 부정형의 주춧돌에 받들려 있고, 두공은 없이 지은 집이다. 누정에서는 우리나라에 침입한 적장을 잡아다가 항복을 받아낸 일이 있다. 그리하여 누정을 '수항루'라 부르게 되었다>

 

 

 

화성쌍계사 -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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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두공렬과 처마

<화성 쌍계사는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백록산에 있는 1684년의 조선시기 사찰이다. 쌍계사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북관지'에도 그 이름이 나오며, 대웅전 마루도리에서 나온 글에 1395년에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조선 초기의 절임이 확실하다. 현존 건물은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1684년에 지은 것이다>

 

 

 

 

 

함흥성 -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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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성은 고려시기 북관을 개척하고 설치한 9개 성의 하나로서 1108년에 축성한 것이다>


 

 

平安道

보현사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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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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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

<기묘하고 수려하기로 이름 높은 묘향산에는 우리나라 5대 절의 하나인 보현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묘향산 보현사는 조선시대 중기에서 후기의 사찰로, 1042년에 창건한 것을 재건한 것이다. 보현사는 빼어난 주변경관과 함께 임진왜란때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사적이 있어 이름이 높은 곳이다. 1216년, 1634년, 1761년의 큰 화재를 맞는 등 여러 차례의 재난으로 보수와 중건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보현사에서 가장 뛰어난 건물은 대웅전(원래는 보광전)으로 1765년에 중창되었고, 묘향산 보현사 8만대장경의 보존 되고 있어 불교도서관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만세루는 지난 6.25전쟁시기 폭격에 의하여 대웅전과 함께 불타 버렸으나, 1979년 대웅전과 함께 만세루는 옛 모습을 다시 갖췄다>

 

 

 

안국사 -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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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이 건물은 1419년에 다시 지었고, 1594년과 1654년, 그리고 1785년에 각각 고쳐지었다>

 

 


백상루 - 평안북도 안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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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루는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장대이다. 안주는 고구려 때의 석성이다. 고려때 처음 세워진 백상루는 조선시기 1753년 읍성의 면모가 완성되면서 고쳐지어지고, 관서8경의 하나로 "관서제일루"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1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開城市

왕건왕릉 - 개성시 해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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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는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개건하였다>


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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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는 고려시대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건설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 후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때부터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 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전한다>

 

숭양서원 - 개성시 선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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