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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4 21:19
오스비엠찜-아우스비츠 나치수용소의 참상을 능가하는 만행--정치범수용소 "22호 관리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284  
“면회 온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약품 등을 빼앗아서 담당 선생에게 준 일 없어?”
“없습니다!”
“사사로이 담당 선생네 집에 땔감을 해준 적은 없어?”
“없습니다!”
“작년 가을에 감자나 강냉이를 훔쳐서 담당 선생네 집에 갖다 준 일 없어?”
“그런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럼 너는 교화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잘 못합니다.”
“너 담배 피우지?”
“길바닥에 있는 꽁초를 주워서 피운 적은 세 번 있습니다.”

비서는 답변을 할 때마다 몽둥이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울분과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며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속으로 ‘투지, 투지!’를 연방 외치며 오후 고문도 견뎌냈다.

규정상 어느 반에서 독방에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반에서 독방의 난방에 필요한 땔감을 보장해야 한다. 저녁이 되자 우리 반장이 독방에 나무를 넣어야 한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했다.

상부의 승낙이 있었는지 반장이 직접 나무를 메고 들어와 천주머니에 감추어 온 강낭떡을 꺼냈다. 내 몰골이 처참했는지 반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장이 돌아가고 얼마 후에 멀리서부터 반별로 번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화소에서 죄인들이 취침 전에 번호를 외치는 소리는 개 짖는 소리와 똑같이 들렸다.

번호 소리가 끝나자 독감방에도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보안과 비서에게 맞은 부위가 쿡쿡 쑤셔와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다리를 쭉 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교화소 독감방은 가로와 세로 모두 1m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다리를 펴고 누울 수도 없었다.

보안과 비서는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도록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잡부조장이 독감방에 들어와서 목공반장 김혁철과 구내반의 취사조장 량명학을 비롯한 나와 친분 있는 사람 6명을 취조 중이라고 알려줬다.

6명 중에서 김혁철과 량명학은 나와 특별히 친분이 두터웠고, 서로만 알고 있는 비밀이 많았다. 잡부조장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나는 문제가 크게 번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보안과 과장, 보안과 비서, 예심원 명철이와 철국이 이렇게 네 명이 동원되어 검열에 들어갔다. 그들의 잡도리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내 담당 관리원도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우리 죄인들 서로가 동요하지 않고 단합하는 것인데 나는 그들이 이런 고문을 이겨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안과 비서라는 자는 나에 대한 첫 고문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자 즉시 방법을 바꾸어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였던 것이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독감방에 들르는 잡부조장으로부터 그들이 나와 같은 고문을 받지만 나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별의별 형식의 고문을 다 경험했다. 보안과 선생들은 등 뒤로 두 손에 수갑을 채워 놓고, 몽둥이로 팔을 비틀기도 하고, 두 팔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발뒤꿈치를 땅에 닿지 못하게 하고 발끝으로 서 있게 하는 고문은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밤 11시가 되면 피투성이가 되어 독감방으로 돌아와야 했던 우리들은 운 좋게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그들은 7일 동안 보안과의 고문과 조사를 받아야 했다. 감방의 동료들은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한 셈이지만 내 죄목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과의 고문과 조사는 더욱 악랄했다.

보안과는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감방 동료들에게 죄 같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웠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어 피웠거나 밥덩이와 다른 생활필수품을 교환했다는 내용의 비판서를 쓰게 하고 그들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나는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 초병의 총을 빼앗았다는 명목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으나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제일 악랄하게 굴던 사람은 보안과 비서였는데 원래부터 내 담당 관리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나를 핑계로 내 담당 관리원을 공격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일 만에 보안과 조사에서 풀려났다. 보안과는 결국 나에게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웠다.”는 진술서밖에 받지 못했다. 독방에서 나오는 길에 담당 관리원과 마주쳤는데 나에게 “독방에 들어가니 살만 하던?”이라며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건넸다.

그는 부식공에게 “야, 준하한테 밥은 먹이지 말고 내가 지시한 대로 죽부터 차례로 먹여라. 알겠지?”라고 전했다. 나는 보안과의 조사와 고문에서 내 양심과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2001년 국가의 ‘대사면’ 명단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교화소이야기⑭] 면회음식 혼자 먹다 끝내 배탈

나는 교화소에서 내로라하는 반장, 티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며 생활했다. 때문에 다른 교화반에서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 보안원들의 악행, 심지어 2과와 4과 등 분소에서 일어나는 실태까지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일반 죄인이었다면 다른 반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다른 반에 고향 친구가 전입을 와도 반장이나 티의 승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 죄인들은 남의 일에 관심 갖기보다는 오직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먹는 문제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전거리 교화소에서 많은 일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나름대로 인생수업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들이 현재 중국 생활에서 큰 밑천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전거리 교화소에서 가장 처음 배운 것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포악성’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포악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화소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딛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 포악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세련되게 되면 교활성을 가진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즈음에서 사람이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교화소의 나쁜 분위기에 물들지 않고 사회에서 자기가 갖고 있던 가치와 생활 방식에 따라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 사람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풀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출소해서 사회로 돌아가면 교화소에 다녀왔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타인의 부러움을 사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두 번째 부류는 교화소에서 습득한 너절한 가치를 자신의 인생관으로 확정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출소자 대부분은 사회에 돌아가도 대중의 비난과 조소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교화소에 잡혀온다.

죄인들이 이런 악순환을 겪는 이유는 교화소의 교화 정책에 있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 죄를 반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포악하고 교활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화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동을 해도 먹는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죄인들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서 면회를 오지 못하는 아내나 가족들을 원망하게 되고, 출소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도 이런 원망들을 가슴속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에서는 교화소 출신자라고 해서 일자리도 잘 주지 않고 배척하기만 하니까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결국 이들은 도적질이나 협잡질에 빠져 다시 교화소에 붙잡혀온다.

곽만호는 당시 33살로 사기협잡으로 교화소에 세 번째 잡혀온 사람이었다. 말을 기막히게 잘한다는 것이 곽만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곽만호가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온 지 거의 1년 만에 그의 어머니가 첫 면회를 왔다. 나는 취사장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면회 나갔던 곽만호가 면회반장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먼발치에서 보니 면회반장이 곽만호에게 한바탕 욕을 하고 있었다. 면회반장은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전직 외화벌이 단위에서 소장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고, 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너 같은 것도 아들이라고 찾아온 어머니에게 그게 할 소리야? 이 개 같은 새끼야!”

평소 점잖던 사람이 저렇게 흥분할 정도면 분명 곽만호가 무슨 짓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유를 물었다.

“아, 이 새끼가 글쎄 늙은 제 엄마 앞에서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오? 내가 옆에서 들어보니 ‘노치 어째 이제야 왔소? 씨베, 배고파 죽을 뻔 했소.’ 이러지 않나? 그래도 그 엄마는 ‘그랬니? 글쎄 너가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오늘에서야 왔다. 소토지 농사지은 강냉이 300kg을 팔아서 왔다.’며 달래는데, 이 새끼가 ‘에잇, 이 간나 노치, 됐다. 다음부터 내게 오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오! 에익, 이 사람 같지 않은 개새끼.”

면회반장은 흥분해 있었다. 면회반장의 말을 들은 나도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순간 참을 수가 없어서 10kg이 되나 마나한 속도전가루를 메고 서 있던 곽만호의 얼굴을 걷어찼다.

마치 곽만호가 우리 어머니에게 욕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섭섭한 마음으로 맥없이 집으로 돌아갈 곽만호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대가리를 땅에 박고 코피를 쏟고 있는 곽만호에게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해주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감방에 돌아오니 저녁 배식이 진행 중이었다. 배식이 거의 끝날 때쯤 곽만호가 감방으로 들어왔다. 반장이 곽만호에게 물었다.

“야, 임마! 너 밥 먹겠나?”
“예, 아직 배가 안 차서 먹어야겠습니다.”

원래 죄인들 사이에서는 면회 음식을 먹고 오면 배식된 자기 밥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관습이 있다. 사람들은 면회 음식을 먹고도 자기 밥을 먹겠다는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봤지만, 반장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밥만은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교화소의 법이었으므로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쯤에 감시창이 열리면서 면회조장이 나를 찾았다.

“준하 조장!”
“무슨 일이오?”
“저 새끼, 방금 면식 칸에서 속도전가루 4kg을 혼자 반죽해서 먹었소. 면식소부에서는 그곳에서 먹을 수 없다고 하니까, 마침 들어온 비서선생에게 먹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비서선생이 ‘임마 너 얼마나 먹겠나?’ 하니까 ‘예, 한 4kg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 거야. 비서선생이 ‘뭐, 4kg을? 너, 다 못 먹으면 나머지를 몽땅 너희 반 허약자들에게 먹인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 자리에서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버렸소.”

뒤에 앉아 있던 곽만호를 쳐다보니 마지막 밥을 입에 넣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짐승 같은 저 인간을 좀 때려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배식이 모두 정리되자 나는 곽만호를 불렀다.

“야, 곽만호!”
“예.”
“너 이쪽으로 오라!”
“예.”

그런데 엉기적 일어서던 곽만호의 입에서 순간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먹었던 것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데, 나는 너무 더러워서 내 옆에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그 인간에게 말도 걸기 싫었다.

새벽 2시. 결국 곽만호의 위가 곽만호 자신은 물론 우리 반 전체를 두들겨 깨웠다. 앓던 소리를 내던 곽만호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면서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벌목! 벌목!”

배식공이었던 현철이 소리를 지르자 술주정뱅이 종학 선생이 가래 낀 소리로 악을 썼다.

“왜 잠도 못 자게 고아대? 빌어먹을 새끼들아!”

종학 선생은 신발을 신은 채 감방 안에 들어와 곽만호를 살펴보더니 위생원 두 명을 불러 곽만호를 데리고 나갔다.

그날 새벽 곽만호는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고야 살아났다. 다음날 아침 교화소에 돌아온 위생원들이 하는 말이 곽만호가 급성 위경련이 일어났는데, 위에서 꺼낸 음식 양이 양동이 하나에 작은 세숫대야 하나였다고 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곽만호를 데리고 갔던 위생원들과 그들을 감시하러 따라갔던 초병들이 한결같이 ‘한 양동이’였다고 해서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람 위가 잘 늘어난다고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나중에 내가 출소해서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에게 곽만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더니 모두가 믿지 않았다. 나는 그때 곽만호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빠져서 그 후로는 ‘만호’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싫어했다.

어쨌든 운이 좋았는지 곽만호는 그날 위경련으로 인해 병보석을 받아 병원에서 석방됐다. 그런데 1년 3개월 후, 곽만호는 또다시 전거리 교화소에 잡혀 왔다.

병보석으로 나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어머니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러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모자라 또 사기협잡질을 해서 붙잡혀 온 것이다. 이번에는 목공반에 배치됐다.

또 죄를 지어 교화소에 들어오면 전에 생활하던 작업반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목공 담당 보안원이 곽만호에게 돈을 받아먹었는지 이번에는 6개월 만에 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6개월 후, 곽만호는 또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왔다. 그의 죄는 역시 또 ‘사기협잡’이었다. 처음에 교화소에 들어왔을 때 사기죄로 교화 6년이었던 그의 형량은 세 번째에 가서는 교화 10년으로 늘었다.

세 번째는 새로 생긴 농장 3반에 배치됐다. 내가 석방될 때 보니 곽만호는 허약 3도로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도 참 불쌍한 인간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어머니와 가족을 귀중히 여길 줄 알며, 더 이상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변모했기를 기원한다.

(다음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