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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7-30 12:03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 다니며 - 수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137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 다니며 수기
탈북자 김춘애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 살다가 1997년에 탈북해 한국에는 2003년 6월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평양에서도 6월부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인민반장이었기 때문에 반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임무가 있어서 장사도 하기 힘들었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997년 8월 15일, 저는 딸을 무산으로 기차에 태워 딸을 보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내아들을 집에 두고 16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담당 주재원을 찾아가 통행증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국경에는 도강생(월경자)들이 많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곳의 지도원을 찾아가 당증까지 맡겼습니다.

9·9절에 받는 고급담배까지 두 갑을 주고, 통행증이 분실되었다는 확인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당증 맡기고 갔다가 사고가 났다간 큰일 난다”며 펄쩍 뛰었습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다시 돌아가 당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증을 반납하고 당증을 돌려받았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대동강을 지나 강동까지는 통근열차를 탔고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사는 청천까지는 걸어서 갔습니다. 큰 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산에는 도강생이 많은데 굶어 죽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소금을 뿌려 주셨습니다. 막내동생의 신랑이 안전부에 있었기에 성천군 집결소에 가서 통행증 분실 확인서를 받았습니다.

성천 역전에 가서 청진까지 기차표를 받았습니다. 검열이 계속되었고, 결국 걸렸습니다. 남편이 압록강체육단에 있다고 속여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체육단에 넣어주겠다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령에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저희는 줄을 지어 내리던 중간에 살짝 빠져나와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는 부령 선을 지났지만 국경선 근처에 이르자 다시 검열이 시작되었고, 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돈은 100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찾으러 가니 제발 봐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돈을 모두 주었습니다. 무산까지 가면 다시 걸릴 것 같아 철산에서 내려 남동생이 있는 무산까지 15~20리 정도를 둘째 딸과 함께 걸었습니다.

무산에 도착하니 남동생도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맏 딸이 시누이와 함께 사발을 팔러 중국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산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10월 10일까지 기다려보다가, 중국으로 건너갈까 아들을 남겨두고 온 평양으로 돌아갈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평양에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중국에 간 딸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까 더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0월 10일이 당창건기념일이라 군대도 휴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건너려고 했으나 눈이 내리는 바람에 다음날인 11일 저녁 6시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려는데 눈이 녹아 불어 난 물살에 둘째 딸을 놓쳐버렸습니다. 한두 시간 찾지 못하고 헤맨 것 같습니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결국 저도 떠내려 갔는데, 운좋게도 딸은 돌 하나에 걸려 살아 있었습니다. 은인과 같은 돌 이었습니다. 둘째 딸을 겨우 찾아 인공호흡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강 건너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올라가 보니 변방대 차가 있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5m 정도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m 정도 옮겨가는데 차 소리가 들리면 다시 숨고 숨기를 반복했습니다. 차 불빛에 보니 변방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도로로 나서지 못하고 맨발로 논밭을 뛰어갔습니다. 뛰어간 곳에는 한 농가가 있었고 중년의 조선족 부부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이불도 씌어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하얀 이밥(쌀밥)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둘째 딸은 평양에서 굶고 있을 동생이 생각난다며 울었습니다. 저도 이밥은 1996년 이후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로부터 중국에서는 조선여자들을 가리켜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돼지’라고 부르며, ‘한 마리, 두 마리’ 하며 다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얼마간 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 받아 화룡시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채소를 사러 장마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둘째 딸이 없어졌습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아도 그들은 모른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저는 딸 찾으러 정신병자처럼 한 달 동안 헤메다 11월 5일, 22살 된 한 조선여자를 만났는데, 팔려와 있었던 그녀는 갈 곳 없는 제 처지가 딱해 보여 자기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3일 정도 그 집에 머무르며 저보다 10살 아래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둘째 딸을 다 찾아주겠다는 말에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식모살이하던 집의 약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가 그 곳을 찾아가보니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용정시 깡패였던 남편이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가니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모로 있던 그 집에서 둘째 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직접 못 팔고 자기 친구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계속 알아보니, 딸은 흑룡강성 마룡현으로 4,000원에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갔지만 팔아먹은 당사자가 잠적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못 찾고 헤맸지만, 인신매매범도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화룡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았습니다.

16세인 딸은 팔려간 곳에서 매일 울었고, 불쌍해 보여서 매일 이웃집들에서 재워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약 100세대가 있었는데 거의 각 집마다 조선여자가 팔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경찰을 꼬아내기 시작했고, 시아버지로부터 4,000원을 받아 양력 설날 즈음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인신매매꾼들로서는 저희 집 하나를 치면 두 명이 나오는 돈벌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달 가량 저희들을 감시하고 순찰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1999년 5월 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들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소 외양간에서 숨어서 잤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인신매매꾼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밤마다 순찰을 돌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너무 아프고 해서 딱 하루만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화가 하겠다며 정신이 빠져 문도 걸지 않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취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 20분 정도 되니 세 명의 인신매매꾼들이 갑자기 나타나 하남 파출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후다닥 방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려고 하니까 제지했습니다. 급한 김에 손길이 닿은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습니다. 어슴푸레 잠이 깬 남편이 놀라 눈을 뜨자, 인신매매꾼들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눌러 밟았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을 속이기 위해 호구를 보자고 했고, 남편이 바로 앞집인 시댁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둘러대니까 나가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딸과 저의 팔을 비틀면서 무조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파출소에서 왔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제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딸이 “엄마 환자인데 왜 때리냐”고 악을 쓰니까 그들은 “그래 너희 엄마 심장병 있어서 환자인거 다 안다”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벌써 저희들을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척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가면 다시 못 올 집이니, 반드시 가지고 갈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증과 시민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까 파출소 차도 아닌 택시가 서 있었습니다.

딸에게 도망가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택시 쪽으로 끌려가던 딸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싸라”고 말했고, 딸은 정말 앉아서 오줌을 싸는 척 하다가 후다닥 밭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농촌이고 밤이라서 온통 새까맣기 때문에 금방 눈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이 당황한 틈을 타 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가면서 저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 사람들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던 찰나 저는 건너 시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오니 그 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위험에서 일단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인신매매의 위험 속에서 우리는 결국 무산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노동단련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우리는 다시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둘째 딸은 이미 청도를 거쳐 2003년 1월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중국의 노래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누굴까 받았더니, “어머니! 나야”하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큰 딸이었습니다. 큰 딸은 목단강 영안에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도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렇게 아들, 딸들을 모두 찾았습니다.

중국에 있다가는 언제 또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될지 몰랐고 한국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6월에 드디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탈북자 김춘애(가명)

 

 

탈북자 김춘애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 살다가 1997년에 탈북해 한국에는 2003년 6월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평양에서도 6월부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인민반장이었기 때문에 반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임무가 있어서 장사도 하기 힘들었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997년 8월 15일, 저는 딸을 무산으로 기차에 태워 딸을 보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내아들을 집에 두고 16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담당 주재원을 찾아가 통행증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국경에는 도강생(월경자)들이 많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곳의 지도원을 찾아가 당증까지 맡겼습니다.

9·9절에 받는 고급담배까지 두 갑을 주고, 통행증이 분실되었다는 확인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당증 맡기고 갔다가 사고가 났다간 큰일 난다”며 펄쩍 뛰었습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다시 돌아가 당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증을 반납하고 당증을 돌려받았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대동강을 지나 강동까지는 통근열차를 탔고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사는 청천까지는 걸어서 갔습니다. 큰 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산에는 도강생이 많은데 굶어 죽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소금을 뿌려 주셨습니다. 막내동생의 신랑이 안전부에 있었기에 성천군 집결소에 가서 통행증 분실 확인서를 받았습니다.

성천 역전에 가서 청진까지 기차표를 받았습니다. 검열이 계속되었고, 결국 걸렸습니다. 남편이 압록강체육단에 있다고 속여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체육단에 넣어주겠다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령에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저희는 줄을 지어 내리던 중간에 살짝 빠져나와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는 부령 선을 지났지만 국경선 근처에 이르자 다시 검열이 시작되었고, 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돈은 100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찾으러 가니 제발 봐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돈을 모두 주었습니다. 무산까지 가면 다시 걸릴 것 같아 철산에서 내려 남동생이 있는 무산까지 15~20리 정도를 둘째 딸과 함께 걸었습니다.

무산에 도착하니 남동생도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맏 딸이 시누이와 함께 사발을 팔러 중국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산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10월 10일까지 기다려보다가, 중국으로 건너갈까 아들을 남겨두고 온 평양으로 돌아갈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평양에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중국에 간 딸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까 더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0월 10일이 당창건기념일이라 군대도 휴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건너려고 했으나 눈이 내리는 바람에 다음날인 11일 저녁 6시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려는데 눈이 녹아 불어 난 물살에 둘째 딸을 놓쳐버렸습니다. 한두 시간 찾지 못하고 헤맨 것 같습니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결국 저도 떠내려 갔는데, 운좋게도 딸은 돌 하나에 걸려 살아 있었습니다. 은인과 같은 돌 이었습니다. 둘째 딸을 겨우 찾아 인공호흡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강 건너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올라가 보니 변방대 차가 있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5m 정도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m 정도 옮겨가는데 차 소리가 들리면 다시 숨고 숨기를 반복했습니다. 차 불빛에 보니 변방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도로로 나서지 못하고 맨발로 논밭을 뛰어갔습니다. 뛰어간 곳에는 한 농가가 있었고 중년의 조선족 부부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이불도 씌어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하얀 이밥(쌀밥)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둘째 딸은 평양에서 굶고 있을 동생이 생각난다며 울었습니다. 저도 이밥은 1996년 이후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로부터 중국에서는 조선여자들을 가리켜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돼지’라고 부르며, ‘한 마리, 두 마리’ 하며 다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얼마간 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 받아 화룡시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채소를 사러 장마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둘째 딸이 없어졌습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아도 그들은 모른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저는 딸 찾으러 정신병자처럼 한 달 동안 헤메다 11월 5일, 22살 된 한 조선여자를 만났는데, 팔려와 있었던 그녀는 갈 곳 없는 제 처지가 딱해 보여 자기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3일 정도 그 집에 머무르며 저보다 10살 아래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둘째 딸을 다 찾아주겠다는 말에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식모살이하던 집의 약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가 그 곳을 찾아가보니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용정시 깡패였던 남편이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가니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모로 있던 그 집에서 둘째 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직접 못 팔고 자기 친구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계속 알아보니, 딸은 흑룡강성 마룡현으로 4,000원에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갔지만 팔아먹은 당사자가 잠적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못 찾고 헤맸지만, 인신매매범도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화룡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았습니다.

16세인 딸은 팔려간 곳에서 매일 울었고, 불쌍해 보여서 매일 이웃집들에서 재워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약 100세대가 있었는데 거의 각 집마다 조선여자가 팔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경찰을 꼬아내기 시작했고, 시아버지로부터 4,000원을 받아 양력 설날 즈음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인신매매꾼들로서는 저희 집 하나를 치면 두 명이 나오는 돈벌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달 가량 저희들을 감시하고 순찰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1999년 5월 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들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소 외양간에서 숨어서 잤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인신매매꾼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밤마다 순찰을 돌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너무 아프고 해서 딱 하루만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화가 하겠다며 정신이 빠져 문도 걸지 않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취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 20분 정도 되니 세 명의 인신매매꾼들이 갑자기 나타나 하남 파출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후다닥 방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려고 하니까 제지했습니다. 급한 김에 손길이 닿은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습니다. 어슴푸레 잠이 깬 남편이 놀라 눈을 뜨자, 인신매매꾼들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눌러 밟았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을 속이기 위해 호구를 보자고 했고, 남편이 바로 앞집인 시댁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둘러대니까 나가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딸과 저의 팔을 비틀면서 무조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파출소에서 왔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제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딸이 “엄마 환자인데 왜 때리냐”고 악을 쓰니까 그들은 “그래 너희 엄마 심장병 있어서 환자인거 다 안다”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벌써 저희들을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척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가면 다시 못 올 집이니, 반드시 가지고 갈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증과 시민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까 파출소 차도 아닌 택시가 서 있었습니다.

딸에게 도망가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택시 쪽으로 끌려가던 딸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싸라”고 말했고, 딸은 정말 앉아서 오줌을 싸는 척 하다가 후다닥 밭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농촌이고 밤이라서 온통 새까맣기 때문에 금방 눈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이 당황한 틈을 타 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가면서 저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 사람들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던 찰나 저는 건너 시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오니 그 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위험에서 일단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인신매매의 위험 속에서 우리는 결국 무산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노동단련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우리는 다시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둘째 딸은 이미 청도를 거쳐 2003년 1월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중국의 노래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누굴까 받았더니, “어머니! 나야”하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큰 딸이었습니다. 큰 딸은 목단강 영안에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도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렇게 아들, 딸들을 모두 찾았습니다.

중국에 있다가는 언제 또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될지 몰랐고 한국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6월에 드디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탈북자 김춘애(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