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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7-30 13:34
탈북수기] 떠나온 고향풍경 (3-4)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411  
[탈북수기] 떠나온 고향풍경 (3-4)
나는 악몽속에서 살아 나왔다.
탈북자 김옥금
3. 나는 악몽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런데 심상치 않다. 열차승무 안전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열차 앞쪽으로 뛰어간다. 창문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참을 목을 빼들고 내다보더니 “또 하나 죽었구만.”하고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말한다.

기차 빵통 위에 앉아서 가던 사람이 잘못 움직여서 전기에 감전되어 죽었단다. 처음 이런 일을 겪은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지만 전문 장사로 기차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싶어 조용히 옆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분명 사람이 죽었단다.

“에이그. 잘 죽었지. 이렇게 맨날 고생하느니 죽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한 거지.” 하고 말하는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 사람이 부럽기까지 한 표정이다.
참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하는 그 사람들의 속은 또 어떤 아픈 상처들로 채워져 있을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칙칙폭폭 칙칙 폭폭. 치~익 칙” 숨 가쁘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던 증기기관차가 드디어 ‘온성’이라고 쓴 기차역에 도착했다. 자강도 강계역에서 배낭을 잃고 출발한지 열흘만이다.

그나마 전기기관차로 왔으면 좀 더 빨리 왔을지 모르겠지만 회령역에서 고물통 증기기관차로 바뀌고서는 한정거장을 가고 한 시간씩 서서 기력보충을 하느라고 기차로 4시간 거리를 5일 만에 온 것이다.

냄새나고 춥고 거기다 배고픈 것은 기본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빵통에서 내렸다. 집이 있는 땅에 내리긴 했지만 장사 한답시고 간신히 꾼 돈을 홀랑 다 털어먹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면 아빠한데 혼날 생각을 하니 집 쪽이 아닌 친구집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그런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 기다린다.
“금아 니네 아버지 상새 났단다.” 친구 언니가 신을 벗으려는 나한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하고 되물으면서 내 머릿속엔 중풍으로 누워계시던 아빠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설마?” “한 며칠 됐다. 소문이 자자하던데.”하고 친구 언니가 말하는 걸 들으며 뛰쳐나와 20리 밖에 있는 집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아닐 거야.” 혼잣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쩜 장사 망한 거 혼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다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20리길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정신없이 달리다 집 앞에 도착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널뛰기를 한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지만 안 보인다.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1년 전 저녁을 드시다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아버지. 동네에 사는 병원 의사에게 달려가 아버지가 쓰러진 얘기를 하고 불러다가 진찰을 해보니 풍이란다.

“가볍게 지나간 것이라서 이제부터 식사 잘 대접하고 영양보충 좀 하고 약 잘 쓰면 나을 수도 있는데…….” 하고 의사가 차마 우리한텐 말 못하고 혼자 말처럼 중얼 거린다.

하지만 한 끼 식사꺼리도 겨우겨우 마련해나가는 우리 집에 영양보충이라니? 약이라니? 엄마와 동생이 매일 석탄 달구지를 끌고 15리 밖에 있는 곳에 가서 손발을 다 얼려가며 겨우 팔아 하루 식량을 해결하는 우리 신세에 어디서 그런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그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왼손과 왼쪽다리를 못쓰셨다. 마비가 온 것이다. 지금 여기 남한 같아서는 그 정도 풍은 아무렇지 않게 고쳐 드릴 텐데. 병이라고 감히 말도 못 붙이게 고칠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과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무능력하게 묶어놓은 것인지? 무엇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쉽게 보내드려야 했는지?

“엄마, 아버지는?”

“상새났다.” <사망했다>

엄마가 울먹이시며 자초지종을 얘기 해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나를 찾으셨단다. 혹시라도 장사 나간 큰 딸이 돈이라도 벌어서 금의환향이라도 하길 바라신건지…….아버지는 “금아 금아” 그리고 조용히 잠드셨다.

그것이 마지막 이였다. 순간 정말 TV에서만 듣던 그 단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목이 메이면서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났다.

4. 나는 악몽속에서 살아 나왔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뒷산 아버지산소에 찾아갔다. 오불꼬불 산길을 돌아올라 아버지 묘소가 보이자 동생이 “저기 아버지 산소”하고 얘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달려가 아버지 앞에 쓰러졌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생전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닌데. 어쩜 아버지가 없으면 술값도 안 들어가고 잔소리도 안 들어도 될 것이라 더 좋겠다고 생각한적 많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너무 슬프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느낌을 그때 첨 느꼈다.


그냥 “아버지, 아버지” 하염없이 울부짖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뱉은 한마디 “미안합니다. 아버지” 그 말이였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나왔다.


큰딸로...서 아픈 아버지 대신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고 하루 두 끼 죽도 겨우 먹게 한 것도 미안하고 돈을 못 벌어서 약도 좋은 것 못 써드리고 돌아가시게 한 것도 미안하고, 아버지 살아계실 때 그 좋아하시는 약주도 맨 날 돈 없다고 안 사다드린 것도 미안하고,


소주 한 병에 강냉이 1kg이니 사다드릴 수도 없었지만 겨우 약주 사드린 날은 안주도 없이 그냥 소금에 절인 배추 썰어드린 것도 미안하고, 다리 아프시다고 다리 좀 밟아달라고 하실 때도 짜증 낸 것도 미안하고. 생각해본 것도 없는데 그냥 미안한 것 천지다.

그때부터 13년이 지난 오늘도 아버지 생각만하면 목이 메이고 “미안해요. 아빠” 이 말만 나온다. 정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아버지한테 잘 해드릴 것이다. 후회 없이, 미안함 없이, 부족함 없이. 그래도 “아빠,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그때 지금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두 번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의 딸로 살 것이라고 했을 테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도 몰랐고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단어인줄도 몰랐다.

오직 “충성, 결사옹위, 총폭탄” 이런 말만 배우고 듣고 외치며 살아온 나였던 것이다. 실컷 울고 산에서 내려오는 내 머릿속에는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하는 의문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집에 와서도 아버지생각에 한참을 더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이다. 또다시 하루 한 끼 걱정으로 하루해가 뜨고 지는 일상의 반복이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 그나마 좁쌀죽으로 배가 불려졌을 때 차라리 내일 아침이 오지 말고 영원히 지금 이 배부른 시간으로 세월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래보기도 했지만 그 바램도 추운 겨울바람에 실려 날라갔나부다. 지겹다.

 

이놈의 세월이 지겹다. 그래도 눈이 떠졌으니 일어나야지.

옆에 엄마와 동생이 누워있는데 배가 쏙들어가서 등가죽에 말라붙었다.

그걸 보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얼른 눈물을 닦고 부엌으로 나가봤지만 자그마한 대접에 담겨진 옥수수가루 몇 줌이 나를 반긴다. 그걸 물에 반죽을 해서 놓고 아궁이에 나뭇가지들 몇 개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감자 몇알 대충 썰어 넣고 옥수수 반죽을 수제비 삼아 뜯어 넣은 '밥'을 식구들이 오구구 모여 먹었다. 그리고 동생과 집을 나선다. 집 뒷산에 땔감 하러 가야한다. 널려있는 썩은 가지들을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등에 지고 “끙”하고 일어섰다.

벌써 해가 중천이다. 오후가 된 것 같다. 하늘의 해를 보고 대충 시간을 짐작하면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주면서 한걸음씩 걷는다. 차라리 올리막 길이 더 낳은듯하다. 내리막은 자꾸 다리가 푹푹 꺾이면서 더 힘들다.

얼마쯤 내려오다가 펑퍼짐한 바위 한 개가 보이 길래 거기에 나무지게를 기대놓고 잠깐 숨을 돌리려고 동생이랑 나란히 앉았다.

맑은 겨울하늘 아래 강 건너 중국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차들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인다. 어느 집에서 뭐 맛있는 걸 해먹는지 고소한 콩기름 냄새가 바람 타고 우리 코에까지 들어와서 위를 뒤집어 놓는다.

“언니, 중국 사람들은 뭐 먹고살까?”

“낸들 아니?” 나도 궁금해진다. 왜 중국 사람들은 저렇게 잘 먹고 잘살까?

잡자기 나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다. 나도 중국에 가야겠다. 가서 돈 좀 벌어와야지. 장사 밑천만 모으면 돌아와야지.

 

그 다음날 평소에 소문 나 있던 도강꾼을 찾아갔다. 며칠 후 나는 옆집 동생, 마을언니와 함께 깊은 어둠을 타고 두만강 뚝에 스며들어 잡관목을 헤치면서 도강꾼과 약속된 장소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중국인 남자 한명이 고무보트를 끌고 와있었다. 우리 셋은 거기에 정신없이 올라타고 국경을 넘어 잠시 후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셋 다 숨도 소리 안 나게 쉬고 있었다. 그길로 어디로 차를 타고 밤새 달렸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어느 농촌마을의 집 앞에 내렸다. 그 집에 들어가자 나이 지숙한 내외가 우리를 맞이했다. 아줌마가 인상이 너무 좋았다.

“배 고플 텐데 밥부터 먹소.” 하면서 하얀 이밥과 김치랑 감자 볶은 걸 내놓았다. 몸과 마음은 바짝 긴장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손은 어느새 숟가락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도 배고픔을 호소하는 인간의 본능에는 이길 수가 없었던 듯싶다. 정신없이 밥을 퍼 먹고 있는 우리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일행을 데리고 온 사람과 집주인이 뭐라고 조용조용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한 시골집에서 하루 세끼 밥 근심 안하고 차려주는 밥을 바닥까지 싹싹 비우며 맛있게 먹었다. 3일째 되던 날 점심쯤 갑자기 차 한대가 마당에 삐~익하고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이상한 느낌이 확 들었지만 벌써 늦었다. 중국 경찰이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경찰에 잡혀 일행은 훈춘 국경수비대 감옥에 끌려갔다. 거기에는 몇 명이 벌써 잡혀 와있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이 시작되었다.

(계속)

김옥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