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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31 14:04
우리가족의 운명을 두고 - 수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626  
우리가족의 운명을 두고 - 수기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그 현실...
탈북자 강 혁

세월은 유수라더니 자유의 땅에 왔다는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쉬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모습만이 남아 문득 나를 놀라게 하곤 한다. 촌스럽고 투박한 말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내가 지금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최신 유행에 맞춰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로, 서점으로 동분서주하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에 바쁘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를 망각하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죄스러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게 고향이라서 이북소식은 늘 빠짐없이 듣는다. 고향의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향의 추억들을 그리며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암흑의 그 시절도 가족들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만은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시간들이 꿈만 같고 행복한 건 이렇게 그 시절을 말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 땅에 대하여 고발하고 성토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어서가 아닐까?

자라오면서 지금도 내가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 중에 제일부럽고 애틋한 게 있다면 방학 때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놀러 가는 것이었다. 어릴 적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으로 놀러가는 친구들이 왜 그리 부럽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왜 그리 서글퍼지던지….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어머니의 아픈 맘을 헤집어 놓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태어났다. 사진조차 남은 게 없어서 나는 당대의 미남이셨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 스케치북에 그려보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바로는, 할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수많은 부상자들과 피난민들을 구원한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많은 감사편지가 몇 년을 이어졌다고 하니 할아버지의 유능한 의술과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마음씨를 짐작할 수 있다.

북한당국은 할아버지를 의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맡기고 승진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보건복지부 최고 직책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1956년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 숙청 사업이라 불린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피바람이 우리 가정에도 불어 닥쳤다. 그 살육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할아버지는 정치와는 관계도 없는 직책에서 희생자로 숙청을 당하셨고 할아버지의 모든 사진과 유물들은 남김없이 몰수당하고 말았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돌곤 한다. 어머니조차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 어머니의 아픈 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할아버지의 사망일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늘 할아버지가 끌려가신 그 날에 누가 눈치 챌까 가슴 조려 하며 남몰래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올리셨단다. 시신마저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는 그 악독한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바랄 수가 있으랴. 이런 불우한 운명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들에게까지 이어졌고 그들 역시 비참하고 원통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죄 아닌 죄를 아들들까지도, 아니 그 손자들까지도 대물림해가며 처형하는 연좌제가 우리 가문의 모두에게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다. 큰 삼촌은 김정일의 생일 파티에 끌려 나가는 만삭인 아내를 만류했다는 죄로, 작은 삼촌은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보위부요원의 앙심으로 가족과 함께 생사를 알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다 떨어진 문짝,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널려 있는 텅 빈 작은 삼촌의 집…. 끌려간 곳도 생사도 모르는 기가 막힌 현실앞에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가슴 속 깊이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그 현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올 그 현실. 내 일생에서 가장 두려웠고 가장 잊혀지지 않는 날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소식들은 더욱 끔찍하고 참담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던 작은 삼촌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항하자 가고 있던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즉결 처형을 했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그곳에서 더구나 전시도 아닌데 무고한 사람을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지금도 나는 그때의 상상할 수도 없는 현실을 떠올리면 몸서리를 치곤 한다. 그렇게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김정일은 과연 알고 있을까? 나는 인권이란 말을 몰랐다. 인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이 자유의 땅에서 인권이라는 두 글자를 되새기곤 한다. 다시는 나의 가족들과 같은 피맺힌 사연들이 생기지 않기를, 다시는 원통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기를, 그토록 끔찍했던 지난 날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내가 되기를…. 나는 오늘도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탈북자 강 혁(가명)

 

 


박광호 14-11-06 02:43
 
강혁님,남한에 정착하시면서 친구 많이 사귀셨나요?친구가 많지 않으시면 제가 친구가 되어드릴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