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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0-11 22:19
수백만 국민을 아사로 숨지게 하고.....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850  
수백만 국민을 아사로 숨지게 하고.....
김하은 인턴 기자. 

길거리에는 굶어 숨진 목숨들을 수 없이 볼 수 있었고, 아이를 업고 동냥 다니는 거지 아빠 엄마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 공기 밥을 위해 부끄럼도 잊고 동냥을 다녔고 등에 업힌 어린것은 그들이 구걸해서 얻은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곤 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땔감도 없고, 물도 잘 나오지 않고, 먹을 것도 없는 세상, 악마의 세상으로 화한 천지에는 아이를 내다 버리는 부모가 늘어갔고,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생존경쟁만이 존재하였다.
 
시장 통에서는 연명을 위해 사기, 절도, 쌈박 질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세상은 아비규환 이였고 꼭 야만인들이 사는 세상 같았다.
 
그뿐이 아니라 전염병까지 수없이 돌아 파라티브스, 장티브스, 발진티브스, 등 원인모를 병들로 수없는 목숨들이 죽어갔다.
 
위생환경이 열악하여 수질이 오염되고, 환경이 불결하고, 영양상태가 엉망이니 세균이 왜 기승을  부리지 않았겠는가.
 
그 끔찍한 광경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를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을 2004년 가을, 5년 세월 남편 없이 딸과 함께 끊임없는 삶의 몸부림을 하였으나 나는 도저히 내가 원하는 삶을 살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우리 두 식구의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각박한, 악몽 같은 삶을 던져주었고, 나는 한 끼를 때우면 다음 끼를 걱정하며 밤잠을 이를 수 없었다.
 
어린 것의 작은 배하나 채워줄 수 없는 어미의 마음, 또 언젠가는 아사로 숨져간 이들처럼 비참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면 몸서리 쳐지고 가슴은 기름 가마에 던져 넣은 것처럼 타들어 갔다.
 
짐승도 먹이를 안주면 우리에서 뛰쳐나올진대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육체가 성한 것이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나는 몇 달을 생각한 후 죽는 한이 있어도 이국으로 가야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앉아서 당하느니 노력이라도 해보아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린 딸애의 삶을 그 더러운 시궁창 같은 세상에 맡겨놓고 싶지 않았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다 죽고 싶었다.
 
결심을 하고 연을 놓아 중국 쪽 친척들과 연계를 맺었고 9월초의 어느 그믐밤에 나는 딸애를 데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혈육의 곁을 떠나 낮 설은 이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애를 두고 떠나라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 나는 “어머니 내가 죽으면 같이 죽고 내가 살면 같이 살면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 없이 어린것이 이 험한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보다 못한 겁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께 애를 두고 가서 어머닐 힘들게 할 수는 없어요.”
 
이렇게 모진 말을 남기고 하염없이 울고 계신 어머니를 멀리하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났다.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국경초소를 3개씩 통과하며 가슴 조이던 순간들은 목숨을 건 두려움의 연속이었으나 나는 그 두려움을 잊으려 애썼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는 길. 그 길이 탈북자들이 택했던 마지막 길이다. 기차를 타고. 한밤중에 목적지로 가는 길은 걸어서 세 시간이 넘는 먼 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기막힌 것이, 열 살짜리 딸애가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걷는 먼 밤길을 힘들다 한마디 투정도 없이, 마치 그런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당 차게 따라 걷던 모습이다.
 
떠올리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쓰리지만 그 길을 떠날 때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각오로 딸을 데리고 떠난 것이 얼마나 잘 한 선택이었는가를 나는 새삼 느끼곤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장밤을 새워 새벽 4시경 두만강, 그 눈물의 강을 처음으로 건널 수 있었다. 다행히 물이 깊지 않아 허리를 좀 넘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
 
낯선 이국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역 땅 이집, 저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희망의 등대불 처럼 반짝 거렸고 나의 가슴은 새로운 삶에 대한 커다란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얼마 후 우리는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과 만났고 그들은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다며 딸애는 교회 목사의 집으로 나는 친척 언니의 집으로 숙소를 정하고 서로 떨어져 살도록 했다.
 
또 다시 생각지 못했던 고달 푼 삶이 시작 된 것이다. 그래도 기초적인 생계도 꾸려가기 힘들었던 고향보다는 조금 나은 듯 했지만 이제 또 다른 고통은 공안에 구속 될 가 무서워 하루도 발편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을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중국의 연길에서 살았던 우리는 잠자리 들 때면 옷도 벗지 못하고 주변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만 울려도 토끼처럼 가슴을 떨면서 날을 보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2년 정도 되었을 2006년 9월 그 악몽 같았던 저녁에 나는 갑자기 밀고 들어온 공안들에게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죄인이 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생각하면 너무나 기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으니, 과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 무서운 쇠고랑을  팔목에 채우는 것인지. 
 
이리 허망한 죄인이 되어 부모님과 혈육들과 친지들에게 수치스런 모습을 보일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고. 어떻게 떠났고, 어떻게 건넌 두만강을 이렇게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는지 통분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날 밤 파출소에서 날을 새며 내 가슴은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밤새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아침에 입술이 다 말라들고 가슴이 불을 삼킨 것처럼 타들어가 소금을 달라하여 물에 타 목을 적셨고, 몸은 내 몸인지, 허공에 떠있는지 알 수 없이 멍청했다.
 
복도로 끌려 나갔을 때 파출소에 볼일 있어 들어온 조선족 평민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는 왜? 하필 많고 많은 나라 중에 그토록 참혹한 나라에서 태어나 죄 아닌 죄인으로 수갑을 차야하고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인간이 온전한 삶을 원하는 게 과연 무슨 죄여서 이런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썩고 미친 독재자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를 참을 길 없었다. 
 

수백만 국민을 아사로 숨지게 하고, 살아 보려고 기약 없이 목숨 걸고 이역 땅으로 떠나는 자기 백성을 잡아다 형장의 이슬로 생명을 앗아가고, 온간 치욕과 아픔과 고통을 던져주는 인간 살인마!
 
북한에서 태어난 이유하나로 짐승보다 못한 삶을 경험해야 하는 우리의 억울함을 과연 어디에다 하소해야 하는지 흘린 눈물은 얼마고 맺힌 한은 또 얼마였던가.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연길시 공안서 공안 몇이 내려오더니 나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 했다.
 
 ‘왜 중국에 왔냐. 중국 와서 무슨 짓을 했냐’ 하던 한 공안이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분이 치밀어  나는 소리쳤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왔을 뿐이다.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을 때리느냐.” 그가 하는 말이 “너 네 나라 대통령이 너희를 배반자라 다 잡아 들이라 했다. 제 나라에 있으며 벌어먹고 살 게지 중국엔 왜 왔냐.”
 
그 공안은 분명 조선족 이였다. 근데 피도 눈물도 없이 마치 먹이를 만난 이리 같았다. 우리는 분명 한 민족 이었고  나의  아버지 고향도 중국 이었다.
 
근데 한 동포의 아픔이 그에게는 한 낮 조롱거리였는지 그의 행패는 한참을 지난 뒤에야 멈췄다.
 
못사는 나라, 못난 통치자를 만난 불운의 나라 사람이라서 당하는 고통은 이역 땅에서 더 뼈아프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 중국을 떠돌고 있는 우리 탈북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 원흉이 저 북한 땅에 도사리고 있지만 아무런 방책이 없이 대를 이어 아픔이 계속되어 고통을 낳고, 죽음을 낳고, 원한을 낳고 벌써 수 십 년이 흘렀다.
 
하루 속히 부조리 한 모든 악이 끊기기를 간절히 소원 한다.
 
파출소에서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나는 이틀 후 도문 변방대로 이송 되었다. 그곳에서 20일간 수감되어 있으면서 우리 탈북인 들의 당하는 비인간적 학대행위를 수없이 볼 수 있었다.
 
입소하는 날 중국공안들은 남자 간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에게 속옷만 입힌 채 무슨 기계 같은걸 로 온몸을 흩으며 킬 킬 거리며 웃어대기도 하였다.
 
우리가 있는 감방에는 여자들이 24명 정도가 갇혀 있었는데 모두 속옷만 입힌 채 머리도 묶지 못하게 하고 남자 간수들이 아무 거리 낌 없이 드나들고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여 다 보며 감시를 하였다.
 
감방 안에서 앞으로 겪어야 할 엄청난 곤란을 생각하니 철창 밖을 날아예는 한낮 날 새의 운명보다 못한 우리의 처지가 기가 막혔고 칠흑같이 암담한 앞날이 온 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갑자기 남자 간수들 네댓 명이 구두 발로 쳐들어와 21살 난 처녀애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애가 자궁 속에 돈을 넣었는데 불편하니 화장실에 들어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 감시 카메라 화면에 포착 되자 이리떼처럼 여자들 감방에 달려 들어와 사정없이 때리며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 돈이 외부로 빠지는 걸 막는다고 피 눈이 되어 날뛰었다. 한국행을 하다 잡힌 애들도 있었는데 밤이면 유리창에 매달려 입김을 불어가며 옆방에 있는 혈육에게 글을 써서 마음을 전하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참 아팠다.
 
이제 한국행이니 가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때로는 하염없이 울고, 때로는 슬픈 노래를 부르기도하고 혈육을 그리고 운명을 한탄하며 벽에 얼마나 많은 원한의 글을 써놓았던지.
 
‘동생을 찾는다.’ ‘독재자 김정일을 증오한다.’ ‘중국공안의 부당한 처사’를 응징하는 글들, 수도 없이 많았다. 
 
간수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 그릇을 씻지도 않은 채 밥 담아 주고, 수지로 된 숟가락마저도 씻지 않고 다시 들여보내 아침에 먹던 숟가락이 점심에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갔다.
 
김정일은 변방대 건물을 건축하는데 돈을 대주었고  탈북자 한사람을 잡아 내보내면 러시아에서 들여온 통나무 몇 입방 씩 중국 측에 준다고 했다.
 
그렇게 돈까지 들여가며 자기 백성을 잡아다 권력유지를 위해 목숨을 앗아가고, 온갖 고통을 안겨주는 인간 백정,
 
우리 북한 주민들 모두를 눈 뚠 바보로 세상에서 제일 미개한 민족으로 초보적인 인간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면서도 항변 한마디 할 수 없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김정일.
 
감방안의 그들도 여자였고 행복 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 인간이다. 머리를 묶고 싶어 냄새나는 감방 안 담요의 실밥을 풀었다 하여 공안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때렸고.
 
눈물 밴 중국 돈을 숨겼다하여, 벽에 글을 적었다하여 연약한 여자들의 몸을 구둣발로 차버릴 때 가슴속엔 울분이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김하은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