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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29 04:58
나는 아빠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601  
나는 아빠다

1999년 7월, 보따리처럼 아들을 둘러메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온 가족이 굶어주겠다 싶어 택했던 극단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품 치는 두만강 한복판에 들어서니 예상했던 것 보다 물살도 세고, 수심도 깊었습니다. 세 살 난 아들애를 머리위로 쳐 들다보니 아내의 허리춤을 놓아버렸습니다. 

어푸, 어푸 하며 저만큼 떠 밀려가는 아내를 보는 순간 엉뚱하게도 ‘아들과 마누라가 강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하겠냐’던 친구들과의 옛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땐 “당연히 아들”이라고 말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아내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아들이나 처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를 쓰고 떠 밀려가는 아내의 허리춤을 다시 잡았고, 그 와중에 강물을 들이켜 정신을 놓아버린 아들을 다시 들춰 업고 중국의 장백 땅을 밟았습니다. 

 * * * 

저는 정말 글쓰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수기로 적어보라는 민 선배의 강요(?) 가 하도 집요해서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처럼 글이 써 지지가 않았습니다. 솔직히 한 문장을 쓰기위해 온 하루를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민선배가 “뭔 글을 그리 오래 쓰냐”며 “북한을 떠나 이곳 대한민국에서 네가 이루어온 일들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두루 적으면 수기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 막막했습니다. 다른 탈북민들에 비하면 전 정말 해 놓은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4월에 ‘하나원’을 나왔고 그해 6월부터 막노동을 했습니다. 함께 ‘하나원’생활을 했던 영학이 명석이, 혁철이와 함께 고층건물 위주의 ‘광고판설치작업’을 맡아 했었습니다. 

광고 설치작업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북에서 배운 것이 막노동이었기 때문에 험하고 어려운 일은 무엇이나 자신이 있었고, 마침 광고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사장님을 알게 되어 그 일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광고 설치라는 게 북에서처럼 대못과 철사가 있으면 마구 떼고 부수는 ‘간판설치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공술로부터 용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수개월, 때로는 일하는 내내 안전교육 등이 필요한 종합인력 시장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달에 130만원, 어떤 때에는 200만원씩 받기도 하는 그 ‘일’이 좋았고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좋아 6년 동안 친구들과 서울 시내 곳곳의 대형건물들에 광고를 설치하고 닦아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광고판 설치작업이라면 얼추 떠오르는 것이 ‘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늘 출근길에 나서는 나를 보고 조심하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잦은 사고는 늘 일어났고 40대 초반의 나이에도 허리며 다리가 쑤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3년 정도 되는 해엔 광화문 근처의 대형건물 옥상에서 작업을 하다가 바람에 날려 5미터 높이의 구조물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대퇴부에 금이 갔고 손가락뼈도 두 개나 부셔졌던 이른바 ‘대형사고’였습니다. 

그날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남아빠. 이젠 우리도 남들만큼 먹고 살고 있으니 험한 일은 그만 합시다. 북에서 생활할 때에 비하면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살고 있는데...좀 쉬운 일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우리가 정말 북한의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사는 구나...’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아니,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살자고 죽을 고생을 하며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탈북자동지회 송년모임때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가 하던 이야기도 떠 올랐습니다. “우리 자신들 뿐 아니라 우리 후대들의 행복을 위해 탈북을 결심했던 것 아니냐. 오늘의 나는 찢기고 터지더라도 우리 자식들에게는 우 리가 겪은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탈북의 의미도 사라진다” 

* * * 

2000년 6월부터 2006년 2월까지...그렇게 6년을 일하고 저는 대한민국에서의 두 번째 직장을 얻었습니다. 

월급도 많이 나오고 정규직이라 여러 면에서 안정적인데 문제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것도 거제도라는 섬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애가 학교에도 갈 때인데 섬이라니...그러면 자식과 아내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면서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러는 내게 아내가 다가와 “당신이 결심하면 나는 어디든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 3월, 지금 살고 있는 거제도로 이사를 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제도의 ‘건하공업’이라는 곳에서 용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제가 이름하여 ‘정착수기’라는 것에 제가 왜 그리도 도리머리를 젖는지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도대체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탈북자들끼리는 서로간의 경쟁심리라는 게 있는데 나는 고작해서 13년간을 노동자로 살았다는 것 외에 정말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수도 하고 의사도 하는, 또 목사님도 되고 단체도 이끌고 있는 선배님들과 친구들을 보면서 부끄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박상학 대표가 이끄는 ‘자유북한운동연합’과 ‘자유북한방송’등에 월급의 일부를 꼭꼭 드리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저의 부족함이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만 인사드리려 합니다. 

선배님들, 친구들, 그리고 아우님들...한 해 잘 마무리 하시고, 혹시 새해에 시간되시면 거제도에 놀려 오세요! 

2014년 12월 거제도에서 용학이가. 

[에필로그]

탈북민 김용학은 1999년 12월 대한민국에 입국, 현재 거제도 소재의 ‘건하건설’에서 6년 동안 고급기능공(용접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워낙 제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친구여서 필자에 대해 조금 더 소개해 드린다면...월 평균수입이 430만원이고 현재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인천에서 대학입학준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럼 혼자 생활하느냐?”고 묻는 질문엔 “월 말 부부”라는 이야기가 돌아왔습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들애가 대학을 졸업 활 때 까지”라고 답하더군요. 

아직도 임대주택에서 생활하는가고 묻자 “형, 뭔소리해. 작년부터 34평짜리 새 아파트에 입주해서 살고 있는데...나 정말 소원 풀었어. 대한민국에 정말 잘 온 것 같아!” 그리고는 껄껄 웃었습니다.
출처/자유북한방송